top of page

[사망요소 있음]

 

청아하고 높은 선율이 악보 위를 거닐 때.

비로소 음악은 완성된다.

 

우연히 들은 연주자의 우아한 소리에  매료되어 시작했던 취미가 어느새 직업이 되어있었다.

화려한 공연장의 샹들리에 아래 매끈한 검정과 은색의 예술이 그녀의 손가락을 타고 청아한 소리를 띄웠고, 희고 고운 손가락이 키를 하나하나 눌러갈 때면 바뀌는 음들이 높으면서도 부드럽게 공연장을 선회해 저마다의 소리가 지휘자의 손끝에서 조화를 이루었다.

바야흐로 오케스트라였다.

그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낮게 울렸고 하프의 선율이 뒤를 이었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그들의 손짓에는 즐거움이 묻어있었다.

그래. 즐거움이었다. 웃고 있진 않았지만, 악기 위에서 춤추는 소리는 분명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었다.

 

"있지 란, 란은 공연할 때 무슨 생각 해?"

"음... 실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니카는 무슨 생각 하는데?"

"물론 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지만 우리가 즐거웠으면 좋겠어!

억지로 하는 건 소리에서도 느껴지거든. 분명 보러 온 사람들도 느낄 수 있을 거야."

"그럼 세니카는 공연할 때마다 즐거워?"

"나? 난 즐겁다는 마음으로 해. 물론 기분이 좋지 않을 때도 있지만, 프로정신으로 하는 거지!"

"그렇구나. 난 그런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는데 역시 세니카는 다르구나."

"내가 처음 봤던 공연이 그랬거든. 그 공연, 보기만 해도 정말 즐거웠거든. 아는 노래도, 아는 악기도 거의 없었지만 듣기만 해도 아 연주자가 즐겁구나. 하는 게 느껴졌어. 나도 그런 연주가 하고 싶어."

"세니카는 우리 중에 제일 뛰어나니까 분명할 수 있을 거야. 난 세니카가 연주할 땐 늘 행복하거든."

"정말? 란이 그렇게 말해주니까 정말 좋다. 있지 우리, 이번 순회공연 끝나면 단둘이 여행 가자. 나, 가고 싶은 곳이 생겼어. 분명 란도 좋아할 거야."

"정말? 좋아 공연 끝나고 어디든 가서 푹 쉬다 오자."

"응 오늘 공연도 마무리 잘하는 거야!"

 

세니카의 피콜로는 유독 유명했고, 덕분에 우리 악단도 공연이 잦아졌다. 피콜로의 솔로파트는 거의 없었지만 세니카는 유달리 인기가 많았다.

 

'분명 거기엔 세니카가 예뻐서 더 그런 걸 거야. 다른 남자가 눈독 들이면 안 되는데... 다음부턴 얼굴을 천으로 가리자고 해볼까...

예쁜 것도 불안했는데 이젠 악기까지 잘하니 더 불안해졌다. 남자친구 있다고 써 붙여놔야 하나... 하여튼 너무 예뻐서 탈이야.'

 

오늘 공연도 순조롭게 끝이 났다. 세니카의 피콜로는 다른 악기 속에 섞이면서도 빛을 발했고, 즐거움이 배어있었다.

세니카의 연주는 참 신기하다. 담백한 기교는 물론이고 듣는 사람마저 그 감정에 동화되게 만드는 신기한 재주가 있다. 나도 그런 연주를 할 수 있을까.

 

"세니카! 오늘 연주, 정말 멋졌어. 듣는 사람이 즐겁다는 그 말. 진짜인가 봐. "

세니카가 란의 말을 듣곤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오늘 란의 연주도 좋았어. 후반부의 플룻 솔로 부분. 정말 좋았는걸."

"정말? 나도 세니카 말을 듣고 그런 연주가 하고 싶었어. 역시나 역부족이었던 것 같지만."

"란도 이제 알았으니 분명 그런 연주를 할 수 있을 거야. 란의 플룻도 우리 악단에서 유명하잖아?"

"그래도... 난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어."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인정받은 거나 마찬가지지~!!"

 

이들이 속한 음악단은 엘리브 시립 음악단으로 로제르카르타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입단하기 어려운 오케스트라 악단이다.

이 둘은 악단의 공연 빈도를 책임지고 있는 주축이다. 실력보단 얼굴 탓인 것 같지만.

세니카 말대로 여기에 입단한 것만으로도 수준급의 실력은 이미 입증된 셈이다.

하지만 얼굴로 더 잘 알려진 탓에 그 실력이 묻혀버리는 게 란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표정 풀어 란... 맞다, 다음 공연은 어디서 한댔지? 다니아였나?"

"응. 동다니아 문화회관에서 한대."

"와 다니아 꼭 가보고 싶었는데... 가서 시간이 좀 있으려나?"

"공연 끝나면 다니아도 들리자. 세니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야지."

"앗 그건 안돼 이미 일정 다잡아놨다구. 다니아는 갈 시간이 없어..."

"다음 연습까지 두 달 정도 빌 텐데 그걸 다 채웠단 말이야?"

"아니 두 달까진 아니구...한 3주 정도... 아 안돼 더는 말 안 해줄 거야.나아중에 공연 다 끝나고 그때 내 화려한 계획을 보여줄게."

"쉴 시간은 있는 거지. 세니카?"

"당연하지!! 휴식이 목적인데 쉴 시간도 없으면 어떡해~~앗 버스 출발한대 얼른 가자, 란~"

버스가 떠난다며 황급히 발걸음을 옮기는 세니카를 따라가며 란이 핏하고 웃었다.

'세니카랑 첫 여행... 재밌겠다.'

"라안~~ 빨리 안 오면 두고 간다~?"

"어어 가고 있어...!"

 

행복해 마지않는 지금 이 순간이 더없이 소중한 날이었다.

 

세니카와 난 단원들과 함께 버스에 몸을 실어 다니아로 향했고, 공연까지 순조로웠다.

지금까지의 공연 중에 가장 완벽했고, 화려했다.

여행은 세니카의 컨디션 악화와 갑작스러운 공연으로 가지 못했다.?

그래서 올해 순회공연이 끝나면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 겸해서 반년 정도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벌써 작년 일이지만 공연이 더 잡혀 여행을 취소해버린 그땔 생각하면 단장 멱살이라도 잡았어야 했는데... 세니카가 말리는 바람에 한동안 째려보는 걸로 넘어갔다. 세니카도 몸이 안 좋았으니까 이 정도로 넘어간 거다.

이번엔 단장에게 단단히 엄포를 놨으니 그땐 공연이 잡혀도 세니카랑 도망칠 거다.

아니, 도망이 아니다. 입단하고서 한 번도 가지지 못한 휴가를 가지는 것뿐. 그럼 그럼. 완전 정당한 이유다.

 

세니카와 결혼식도 두 달 앞으로 다가왔다. 공연 준비에, 드레스를 보고 식장을 보러 다니고... 바빴지만 행복했다. 그것도 더할 나위 없이. 내가 그녀의 반려자가 된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세니카가 흰 드레스를 입고 날 바라봤던 날은 특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뭘 입어도 예쁜 바람에 드레스를 못 골라서 결국 세니카가 골랐다. 내가 골라주고 싶었는데...

결혼식 준비를 하며 신혼집을 일찍 얻어 미리 같이 살면 안 되냐고 물었는데 결혼 전엔 절대 안 된다는 세니카의 단호한 말에 짐만 들여놓았다.

 

이제 내일이면 정말 세니카와 부부가 된다.

둘 다 음악단 소속이라 그런지 결혼식의 음악은 악단에서 연주해 주겠다고 했다.

실력만큼은 보장되는 곳이니까 꽤 좋은 서비스다.

 

세니카의 몸 상태가 안 좋았을 때 병원에 데려가서 종합검진을 받았었고 병의 진행은 거의 멈춰있어 약물치료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했다.

아직도 세니카는 약한 것 같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지금도 불현듯 그때가 생각나 세니카 정말 괜찮은 거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활짝 웃으며 괜찮다고 말해주는 그녀를 보며 어물쩍 넘어가긴 하지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내일을 생각하니 두근거림이 앞선다.

 

“란~~!”

“세니카 잘 잤어? 아픈 덴 없고?”

“응! 컨디션 완전 좋아. 근데 란은 못 잤어?”

“어? 어... 못 잤어...”

“신랑 얼굴이 이렇게 못나서야... 얼른 가자 변신을 좀 시켜야겠어.”

나의 손을 잡아끌고 앞장서는 세니카의 손이 따뜻해서 기분이 좋았다.

‘신랑... 정말 결혼이구나.’

새벽부터 나와서 졸렸지만, 왠지 신나서 가벼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헤어샵 의자에 기대어 잠들기를 잠깐, 세니카가 날 부르는 소리에 깼다.

 

"란~ 끝났어. 일어나!"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뜬 것 같은데 내 눈앞엔 눈부시게 예쁜 세니카가 있었다.

“란~! 어때 거울 봐!”

“세니카...정말 예쁘다.”

"아니 그건 당연한 거고! 란을 보라구."

"어... 이게 나...?"

"란 이상한 말 하지 말고 다했으니까 이제 가자 시간이 빠듯하겠어."

'회심의 한마디였는데 이렇게 패스 당할 줄이야.'

 

분주한 세니카의 뒷모습이 왠지 모르게 가냘팠지만 다이어트한다며 날 끌고 걸었던 걸 생각하곤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하여튼... 다이어트 할 필요 없다고 했는데 너무 말랐어.'

결혼식장에서의 세니카는 주인공답게 반짝반짝 빛났고. 세상에서 제일 예뻤다.

새하얀 웨딩드레스와 대비되는 칠흑 같은 머리가 정말 잘 어울렸다.

축가와 어우러진 음악 역시 멋졌다. 오랜만에 들어본 세니카의 악기 연주가 아닌 노래는 새롭고 좋았다. 세니카는 가수를 했어도 분명 성공했을 것이다. 하지만 피콜로를 들었을 때의 세니카가 역시 제일 잘 어울렸다.

세니카를 쳐다보느라 결혼식이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겠다. 세니카에 이끌려 정신을 차려보니 비행기 안이었다.

신혼여행은 즐거웠고 세니카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고 나는 그걸로 좋았다.

그녀가 가고 싶어 했던 다니아에서 버스킹 공연도 봤다.

먼 훗날 늙으면 피콜로와 플룻을 들고 전 세계를 다니며 길거리 공연을 하자는 약속도 했다.

 

신혼집에서 처음으로 함께하는 그야말로 완벽한 하루였다. 커튼 틈새로 들어오는 빛과 날 감싸 안은 따뜻한 그녀의 온기가 느껴지는 완벽한 하루.

훅 끼쳐오는 달콤한 향처럼 단번에 사랑이 와닿았다.

'이런 게 정말 사랑이구나.'

눈을 뜨면 세니카가 있었고 눈을 감을 때도 내 곁을 함께했다.

행복해 마지않는 날들의 연속이 꿈처럼 내게 다가왔고 그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웃음이 나왔다.

 

여느 때와 똑같았다. 오히려 더 완벽한 날이었다.

열린 창틈 사이로 들어오는 살랑 바람과 따뜻한 햇볕이 날 기분 좋게 깨웠고, 자연스럽게 내 사랑을 안았다.

하지만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은 비어있었고 황량하리만큼 넓은 침대가 외로움을 가중시켰다.

그래. 한순간의 꿈이었다. 그녀는 내 곁을 떠났다. 아직도 그녀의 온기, 향기, 목소리가 생생한데 다신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내 가슴을 쳤다.

호전되고 있다던 그녀의 병은 오히려 악화되었고, 내겐 그 사실을 숨긴 채 손을 뻗어도 닿지 못하는 곳으로 영원히 도망쳤다.

그녀와의 약속은 지킬 수 없게 되었고 나는 아직도 꿈의 경계에서 그녀를 그리워하며 매일을 울부짖고 있다.

 

공연은 쉴 수 없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피폐해진 날 찾아온 동료가 건네준 것은 세니카의 편지였다.

자신이 없어도 듣는 사람이 즐거운 연주를 할 것, 늘 하던 대로 할 것.

원망스러울 만큼 간결한 글자들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이제 여기 없고 난 그녀가 말한 걸 지켜야만 했다.

하지만 듣는 사람이 즐거운 연주. 그거 하나만큼은 할 수 없었다.

"세니카, 네가 없는 곳에서 난 즐겁지 않아. 이건 못 지켜줄 것 같아 미안해."

 

그의 연주엔 더 이상 즐거움은 실리지 않는다. 그녀의 피콜로는 이제 그의 손에 들려있다.

가슴에 묻어야만 했던 그녀의 가장 큰 흔적은 이제 그와 함께하고 있다.

잡음 하나 섞이지 않은 청아한 구슬픔이 공연장에 울려 퍼진다.

란의 눈에 눈물이 맺혔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그녀의 예술을 그가 전달하는 이 순간만큼은 오롯이 그녀를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녀가 했던 것처럼 하나하나 키를 눌러가며 불어넣는 숨이 처연함을 토해냈다.

 

그의 슬픔은 예술로써 다시금 승화해 늘 그녀를 새길 것이다.

그것만이 그의 곁엔 그녀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란에게 있어 세니카는 완벽한 연주자였고, 세니카에게 있어 란은 완벽한 관객이었다.

그들이 오롯히 하나가 될 때 그들의 예술은 비로소 탄생한다.

지금 란은 예술을 노래하고 있다. 세니카와 함께 언제나 꺼지지 않는 영원의 예술을.

[후기]

안녕하세요 글을 세번이나 갈아엎은 바람에 완성도가 떨어진 것 같아 합작에 누가 된 건 아닌지 걱정이 되네요ㅜㅜ

분명히 이번엔 해피다! 하면서 썼는데 끝으로 가니까 찌통이 땡겨서 급 찌통이 된 것 같아서 불안하기도 하네요. 누군가를 울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썼지만 역시나 역량부족인가 봅니다. 다음 합작에도 참여하게 된다면 그때야 말로 누군가를 울릴 수 있는 글로

돌아오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원의 예술

©2020 by Flat: TRUMP op.117. Proudly created with Wix.com

bottom of page